거주지에 따라 갈 수 있는 병원이 정해지는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초고령사회 대비 지역보건·일차의료 권고안에 '소생활권'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도입한다고 밝혔고, 대한내과의사회를 비롯한 개원가가 즉각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저는 '설마 이게 실제로 추진되는 건가' 싶었습니다. 집을 구할 때마다 병원 접근성을 따지며 어렵게 동네를 골라온 입장에서, 이제는 거주지가 진료 범위까지 결정한다는 발상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소생활권과 진료권 제한, 실제로 어떤 문제인가
이번 권고안에서 핵심은 '소생활권'이라는 공간 단위입니다. 소생활권이란 행정동 수준의 소규모 지역 단위를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네 하나 정도의 범위입니다. 정부는 이 단위를 보건지소·건강생활지원센터 등 공공 보건인프라 배치 기준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고, 개원가는 이것이 의원급 의료기관의 진료범위나 환자 등록 제한 기준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한내과의사회가 "명칭만 다를 뿐 인두제와 다름없다"고 비판한 부분이 저는 가장 눈에 걸렸습니다. 인두제(Capitation System)란 환자 수를 기준으로 의사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료 건수나 내용과 무관하게 등록된 환자 수에 따라 수가가 결정됩니다. 영국 NHS 등 일부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지만, 의사가 환자를 더 보려는 유인이 사라진다는 단점이 있어 국내에서는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반복돼왔습니다. 소생활권 기준이 그대로 적용되면 사실상 이 구조가 간접적으로 구현되는 셈입니다.
제가 직접 이사를 알아보면서 느꼈던 것도 결국 이 지점이었습니다. 큰 병원이 있는 지역은 교통도 좋고 인프라도 갖춰져 있어 집값이 높고, 예산에 맞추다 보면 결국 외곽으로 밀려납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외곽에서 살면서 좀 더 나은 병원을 찾아가는 선택지마저 행정 단위로 묶어버리겠다는 겁니다. 제가 경험상 이건 단순한 의료 정책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사느냐가 얼마나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권고안을 마련한 초고령사회 의료체계전문위원회는 의료혁신위원회 산하 기구입니다. 그런데 대한내과의사회는 이 위원회에 실제 지역사회 일차의료를 수행하는 개원 일차의료계 대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습니다. 제도를 실제로 현장에서 운용할 사람들의 목소리가 설계 단계에서 빠진 채 추진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저도 충분히 타당한 지적이라고 봅니다.
- 소생활권: 행정동 수준의 소규모 지역 단위로, 진료범위 및 환자 등록 제한 기준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음
- 인두제(Capitation System): 등록 환자 수에 따라 수가가 결정되는 방식으로, 소생활권 도입 시 사실상 유사한 구조가 구현될 수 있음
- 개원가 요구: 초고령사회 의료체계전문위원회에 개원 일차의료계 대표 위촉 및 의견 진술 기회 보장 요청
- 공공보건의원: 의료기관이 없는 지역에 한정해 도입하고, 동네의원이 기능하는 지역에는 신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
의료격차를 고착시키는 설계, 무엇이 달라져야 하나
대한내과의사회가 이번 성명에서 가장 강하게 문제 삼은 것은 '거주지 단일 귀속' 원칙입니다. 거주지 단일 귀속이란 환자가 살고 있는 지역 하나에만 진료 기반을 귀속시키는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사는 곳 근처 병원만 가라'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실제 의료 이용 패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직장 근처에서 간단한 진료를 보거나, 아이 학교 근처 소아과를 이용하거나, 전문 진료를 위해 일부러 멀리 이동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의사회는 부득이하게 공간 단위를 설정하더라도 거주지·직장·학교 소재지 등 실제 생활 동선에 따른 복수 귀속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불어 진료권 설정 기준으로 도시계획상의 행정구역 개념 대신 헬스맵(Health Map) 유입·유출 자료 등 실제 의료이용 흐름에 근거한 단위를 사용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헬스맵 분석이란 실제 환자들이 어느 지역에서 어느 의료기관으로 이동하는지를 데이터로 파악하는 방식입니다. 행정구역 경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이동 경로를 기반으로 의료권을 구획하는 것이 훨씬 현실에 가깝다는 얘기입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가장 핵심입니다. 지금도 의료 인프라가 잘 갖춰진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사이의 격차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 격차 때문에 이사할 때 병원 접근성을 따지고, 예산이 부족하면 외곽으로 밀려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거주지 기준 진료 제한까지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의료 인프라가 좋은 지역에는 수요가 더 몰려 집값이 더 오르고, 인프라가 취약한 지역 주민은 멀리 있는 더 나은 병원에 가는 것조차 제도적으로 막히게 됩니다. 이미 벌어진 격차가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적으로 심화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출처: 보건복지부의 자료에 따르면 농어촌과 도시 지역 간 의료 접근성 격차는 지속적으로 보고되어 왔습니다.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진료권을 나누는 방식은 이 격차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행정 편의상 선을 그어 현실을 외면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또한 출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공개하는 의료이용 통계에서도 환자들의 실제 진료 동선은 거주지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수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데이터가 말하는 현실과 정책이 설정한 기준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큽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초고령사회를 대비하는 정책이라면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의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이어야 하는데, 지금 권고안의 방향은 거꾸로 진료 이용의 자유를 행정구역으로 조이는 쪽에 가깝습니다. 의료이용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입니다. 거주지라는 단일 기준으로 국민의 의료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은, 단순한 제도 설계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소생활권이 도입되면 지금 다니던 병원을 못 가게 되나요?
A. 아직 확정된 제도는 아닙니다. 다만 권고안 기준이 그대로 적용될 경우, 의원급 의료기관 진료범위가 행정동으로 한정될 수 있다는 것이 개원가의 우려입니다. 현재는 정책 방향이 논의 중인 단계이므로 추이를 지켜봐야 합니다.
Q. 인두제가 뭔데 그게 왜 문제라는 건가요?
A. 인두제(Capitation System)는 등록된 환자 수에 따라 의사 수가가 결정되는 방식입니다. 진료를 많이 보거나 잘 볼수록 보상받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의료의 질이나 서비스 개선 유인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 핵심 우려입니다. 소생활권으로 환자 등록 범위가 묶이면 사실상 이 구조와 유사해진다는 게 의사회의 논리입니다.
Q. 공공보건의원은 어디에 생기는 건가요?
A. 대한내과의사회는 공공보건의원을 동네의원이 없는 의료 취약 지역에 한해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미 동네의원이 기능하는 지역에 공공보건의원을 신설하면 민간 의료기관과의 중복·충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Q. 소진료권과 소생활권은 같은 개념인가요?
A. 공식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 혼란이 있는 상황입니다. 대한내과의사회도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 전략에서 등장하는 '소진료권'과 이번 권고안의 '소생활권'이 어떤 관계인지를 정부가 먼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론
제가 이번 소생활권 논란을 보며 가장 답답했던 건, 정책의 방향성 자체가 아니라 그 설계 방식이었습니다. 초고령사회를 대비한다는 목표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거주지라는 단일한 행정 기준으로 진료권을 묶는 방식이 현실의 의료이용 패턴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수행할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만든 설계는 탁상공론일 뿐이라는 개원가의 비판이, 이번만큼은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정책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는 앞으로 공개 토론회와 권고안 상정 과정에서 더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건 관련 논의를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의료 접근성은 어느 동네에 사느냐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보장돼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번 논의의 결론이 어디로 향하는지 계속 관심을 갖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 https://www.dailymedi.com/news/news_view.php?wr_id=939320